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화조 사건 (문단 편집) == 채문덕 == 채문덕은 김정일과 동시대에 [[김일성종합대학]]을 다녔고, 졸업 후 평양시 안전국장, 즉 한국으로 치면 [[서울지방경찰청]]장까지 오를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렸다. 그런데 1992년 당시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였던 [[문성술]]과 평양시 당 책임비서였던 [[서윤석(1928)|서윤석]]이 채문덕을 견제하기 시작한다. 그들은 채문덕이 김정일의 위세를 믿고 "안하무인적으로 경거망동하고 있다"며 공격한 것이다. 이것이 계기가 되어 채문덕은 [[평안남도]] [[북창군]]으로 쫓겨가고 득장 분주소장, 즉 한국의 파출소장으로까지 격하되고 말았다. 그러나 채문덕은 [[장성택]]의 후원으로 1995년 중앙정계로 복귀하고, 이듬해 1996년에는 장성택의 형 [[장성우(1932)|장성우]]가 맡고 있던 '[[인민보안부|사회안전성]] 정치국장'이라는 핵심보직을 꿰차게 된다.[* 장성우는 [[호위사령부|평양방어사령부]] 3군단장으로 영전해간다.] 채문덕은 김정일에게서 한 가지 지시를 받는데, "우리 가문을 착취한 최지주라는 자가 있는데, 그의 아들은 남조선으로 달아나 장성이 되었다. 그러나 그의 또다른 가족들과 자손들은 북조선에서 아직도 출신을 속인 채 살고 있지만 잡아내지 못했고, 아울러 [[6.25 전쟁]]에서 남조선에서 활약한 [[서북청년단]]의 잔당들이 지금도 북조선에 남아있으니 이들을 반드시 잡아내어 숙청시키라"라는 내용이었다. 표면상으로는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것이었으나, 실상은 김정일이 '''[[숙청|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철두철미하게 박멸시킨다]]'''는 본심이었던 것이다. 이러한 목적으로 김정일은 채문덕에게 '''심화조'''라는 조직을 만들라는 지령을 내리고, 이 심화조로 하여금 북한 전국의 모든 간부들을 '재검토', 즉 자세히 재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. 그런데 1995년 말에 평양시 [[룡성구역]]에서 생긴 대수롭지 않은 한 사건이 이 엄청난 [[숙청]]극의 서곡을 올리게 된다. 당시 룡성구역 안전부 주민등록과의 안전원 박 모라는 인물[* 북한은 주민통제를 위해 주민등록 업무를 [[인민보안부]]에서 운영한다. 남한으로 치면 거주 시군구 경찰서에서 맡는것.]이 룡성구역 행정위원장을 "[[간첩]]"으로 신고한 것이다. 박 모에 따르면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주민등록 자료를 보던 중 행정위원장이 [[미군]] 첩보기관에서 훈련을 받은 뒤 6.25 전쟁 때 남조선을 통해 침투한 간첩임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, 나중에 이 신고는 허위로 밝혀져 박 모는 간부 모함죄에 걸려 되려 자신이 [[불명예 전역|생활 제대]]를 당하고 심지어 [[량강도]] [[백암군]]으로 추방까지 당했다. 그러던 중 TV 뉴스를 통해 [[미국]]산 무기와 수류탄, 총탄이 룡추동 뒷산에서 발견된 사실이 보도되면서, 행정위원 역시 [[서북청년단]] 잔당이었다는 발표와 함께 행정위원이 총살됨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반전이 된다. 그 박 모라는 사람은 신분이 회복됨은 물론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게 된다. 사건의 발단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을 따서, 이후로 벌어질 사태를 "[[채문덕 사건]]"이라고 부르기도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